[심리톡톡 나와 만나는 시간](6) 정신건강 전문의 이나미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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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외로워야 해요, 가슴이 뚫려야 해요… 그래야 새로움이 생겨요

▲ 슬픔과 절망 없인 창조 역시 불가능… 창조적 에너지는 이상한 것과 정상적인 것의 중간에서 나와…‘작은 나’ 버리고 ‘큰 나’를 지향해야

경향신문 연례기획 ‘심리톡톡-나를 만나는 시간’ 6월 강연에서는 이나미 박사를 초청해 슬픔과 분노의 힘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융 심리학 전문가로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오십후애사전> <한국사회와 그 적들> <슬픔이 멈추는 시간> 등 유려한 심리에세이들을 발표해온 그는 슬픔과 절망 없이는 창조 역시 불가능하다는 역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 13일 저녁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여적향에서 열린 강연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이나미 심리분석 전문가가 지난 13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심리톡톡’ 강연에서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란 주제로 청중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나미 심리분석 전문가가 지난 13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심리톡톡’ 강연에서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란 주제로 청중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세월호 참사 이후 사람들이 간신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많은 생각들을 하시나 싶어요. 제가 가지고 있던 분노라는 게 여기 오신 분들의 따뜻한 얼굴 때문에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네요.

오늘 발표의 주제는 슬픔이 어떻게 창조적인 에너지를 내느냐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슬프면 우울하잖아요. 우울하면 정신·신체 에너지가 떨어지고 생산성이 떨어지고 이럴 것 같잖아요. 생각 외로 많은 실험에서 기분이 좋아 붕 떠서 좋은 사람보다 때때로 슬프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창조적 에너지가 응축돼 있더라는 결과가 나왔어요.

이 이미지들은 포르츄나, 사피엔시아, 관세음보살(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입니다.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이죠. ‘포르츄나’는 재물을 가져다주는 신이고, ‘사피엔시아’는 지혜의 신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국 쪽에서 운명을 헤쳐나가는 지혜로운 신으로 알려져 있죠. 그림을 보시면 포르츄나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같은 것에는 금이 들어 있어요. 포르츄나가 말하는 운명은 재물이죠. 사피엔시아는 가슴이 둘인데 이 가슴으로 젖을 먹여요. 가장 힘들 때 어머니가 젖을 주듯이 힘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젖을 먹여줌으로써 헤쳐나가게 하는 신이죠. 관세음보살은 여러 가지 이형이 많은데, 중국의 여러 전설 중 하나에 따르면 공주 출신인 관세음보살이 어려서부터 자신은 비구니가 되겠다 하니까 왕과 왕비가 갖은 핍박을 가해요. 그러다 왕과 왕비가 병이 들었는데 의사가 와서 말하길, ‘산 사람의 눈과 살을 먹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 관세음보살이 자기 눈을 떼고 팔을 잘라서 부모에게 줘요. 왕과 왕비는 낫고 관세음보살은 손이 천 개, 눈이 천 개가 생깁니다. 끔찍한 이야기지만 원형적인 모티브가 되는 거죠.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바리데기 전설이 있죠. 이걸 말씀드리는 이유는 포르츄나의 운명을 개척하는 방식, 사피엔시아나 관세음보살이 운명을 극복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드리고 싶어서죠. 자기를 버리고 큰 것을 향해 갈 때 운명이 진실로 더 한 단계 높고 깊게 변한다는 것이죠. 융 심리학에서 말하자면,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를 지향할 때 슬픔이 창조적인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긴장과 경쟁, 적당한 스트레스 때 창조적 삶

아무리 슬프더라도 슬픔을 극복해 창조적으로 만들어야 하잖아요. 내가 사업에 실패해 빚이 몇 억원 있다고 하면 항상 울면서 슬퍼만 할 수는 없잖아요. 새로운 것을 찾아봐야겠다는 것이 창조적인 에너지예요. 사람의 성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지 여부죠.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 자본주의 시대니까 성공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가장 돈 많은 사람들 통계로 보면 아이비리그 출신은 5%도 안됩니다. 대학 안 나온 사람이 20%에 육박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들이죠. 지능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포함한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우울한 병에 걸려 있거나 우울해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창조적인 사람은 우울한 사람일까요.

창조적인 에너지는 이상한 것과 정상적인 것의 중간이에요. 에지(edge)라고 하죠. 가장자리에 있을 때 창조적으로 됩니다.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창조적이에요. 보수적인 사람들은 창조적이게 되기는 어렵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들이에요. 진보적인 사람들이 창조적이어야 하는데요.

우리나라 진보는 창의적이지 않아요. 아이디어가 없어요. 보수가 너무 싫지만, 진보가 대안을 제시 안 해줘요. 보수적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지만, 진보가 밸런스를 못 맞춘다는 거죠. 진보가 진보답지가 않아요. 굉장히 기득권에 집착해 오히려 보수보다 보수스러운 그런 모습이 가끔 보여요. 우리나라 진보는 네트워크를 잘 형성 못하는 것 같아요. 오늘 문창극 총리 지명자 관련 기사도 나왔는데요. 너무나 기억나는 게 탕평인사라면서 친이계를 쓴 것이라고 해요. 탕평책은 친박과 친이계를 섞은 것이라는 거죠. 나머지는 사람이 아닌 것이죠. 근데 그런 것을 욕하지만, 진보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죠. 노무현 대통령 때도 코드인사를 했잖아요. 지금보다는 낫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가 네트워크가 굉장히 작았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보수를 욕하지만 진보도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한 부분, 진보가 진보답게 신속하게 나가지 못하고 항상 뒷북을 쳤던 것들, 뭔가 비전을 제시해 아이디어를 선점해야 하는데 신속하게 결정을 못 내리는 것들이 참 아쉽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나라의 천재들을 볼게요. 특히 김수환 추기경은 종교적인 부문에서 전무후무한 분이죠. 진보건 보수건 나이가 젊거나 많거나 아우를 수 있는 것도 사회적인 창조죠. 창녀였던 여자의 증언인데, 다른 유명인사들은 자기를 만나 “왜 그렇게 사느냐”며 가르치려 했으나 추기경은 이야기를 듣고 “고생 많이 했겠네”라며 딱 거기까지만 했다는 거예요. 잘 들어주는 능력이 있는 거죠. 판단하지 않고 공감해주고 섣부른 조언을 하지 않는 것이 창조적인 리더입니다. 지시만 하는 리더는 집단을 창조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지시만 하는 사장은 “불 날 위험이 있으니까 조심하라”고만 합니다. 지시형이 아닌 리더는 “불 날 위험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어요. 그럼 구성원들이 알아서 아이디어를 꺼내요. 지시하는 조직과 다르게 창조적인 조직으로 변합니다. 잘 들어주는 스타일이 창조적인 지도자의 한 전형입니다. 하지만 창조적인 사회는 편안한 사회는 아니에요. 긴장감도 있고 경쟁도 있고 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 게 창조적인 삶입니다. 창조적인 삶을 이끌어내려고 지도자가 악역을 할 때도 있어요. ‘A+’ 남발하는 학교는 결코 좋은 학교가 아니에요.

인체의 신비를 볼게요. 긍정적 피드백과 부정적 피드백이 있습니다. 디하이드로에피안드로스테론 설파이트(DHEAS)라는 호르몬과 코르티솔은 길항작용을 하는 호르몬입니다. 코르티솔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분비되는 호르몬입니다. 위궤양도 생기고 성호르몬이 이상해져 생리불순이나 성관계도 잘 안되고 혈관이 위축돼 심근경색, 뇌졸중, 암 등의 원인이 됩니다. 요즘 불임부부가 많은 이유도 호르몬 영향이 있어요. 근데 코르티솔이 나오면 몸에서는 DHEAS가 나와 이걸 견제해요. 스트레스가 너무 없을 땐 지루해서 죽어요. 입맛도 없고요. 인간은 딱 두 가지라고 해요. 권태롭지 않으면 불안한 거죠. 뒤집어보면 불안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지루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거죠. 우울한 영화를 본 다음에 판단력과 정확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어요. 아마도 우리 국민의 판단력이 최고조였을 때는 세월호 사고 직후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 때론 우리 안의 ‘어두운 부분’ 볼 필요

심리학자 카를 G 융은 17세기 영국시인 윌리엄 브레이크를 좋아했어요. 그가 그린 그림에서 가운데 웅크린 사람이 하느님입니다. 불경스럽게 보실 줄 모르겠지만. 하느님 위에 어둠이 있죠. 그 어둠의 무게에 눌려 있는데요. 하느님도 창조 전에 눌려 있는데, 우리는 어떻겠어요. 창조 직전의 우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봅니다. 창조적인 행동을 하려면 고립감, 외로움을 꼭 느껴야 한다는 거죠. 동네 여기저기 다니면서, 계모임 다 가고 아침 저녁 연속극 다 보고 화장하고 이러다보면 창조적이게 되기 어려워요. 외로워야 해요. 가운데 구멍이 뚫려야 해요. 꽉 차 있으면 창조적이기 어렵습니다. 가슴이 뻥 뚫려 있고요. 이효리 같은 사람은 제주도 가길 잘한 것 같아요. 버려야 뭔가 다시 채워지죠. 좌절, 상처, 분노에서 다시 해가 뜬다고 해요. 슬픔에 잠겨 있으면 당시에는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아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사람은 또 살게 돼 있죠.

문필가는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에게 큰 빛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옷차림 추레해도 뭔가 따뜻해지는 듯하죠. 그런 사람들 보면 상처가 있어요. 상처가 있는데, 남 탓 하지 않고 꼭 운명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아요.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극복한 사람들에게는 상처 모르는 사람들이 모르는 에너지가 있어요. 진짜 가치 있고 존경하고 따라야 할 사람이에요. 지식이나 지위와 상관없는 거죠.

모든 세상에는 행복한 게 있으면 불행한 게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극복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공 뒤에 자리한 그림자는 깁니다. 융 심리학의 핵심적인 개념인데요. 우리 안의 ‘그림자’를 볼 때가 필요해요. 작은 자아는 욕망에 휘둘린다면 큰 자기는 그것을 뛰어넘는 거예요. 큰 자기 성취를 위해서는 자기 안의 어두운 부분을 봐야 한다는 거예요. 자기 안의 어두운 부분을 보는 사람이 창조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창조다” 이러면 경제적인 것만 생각하죠. 창조경제. 창조적 기업 등. 창조는 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너무 서구의 기능주의적 창조적 이론에 의존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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