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잘 쓰려면? ‘기준선’만 기억하세요” 이병대 한글필기체연구소장이 말하는 ‘한글의 품격’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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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글씨 콤플렉스 벗어나는 법

지난 1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 사옥에서 ‘인생수업 : 글씨 콤플렉스 벗어나는 법’ 강연이 열렸다. 이제까지 빈말로라도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강연에 참석하기 앞서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집어들었다. 모든 작업은 노트북으로 하는 데다 간단한 메모조차 스마트폰에 입력해온 탓에 퍽 서먹서먹해진 도구. 육각진 플라스틱의 낯선 감촉이 말랑한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학생 때는 중지 첫마디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글자씩 평소 필체대로 끄적여봤다. “글씨…잘…쓰고…싶어….” 맵시는 둘째 치고 다른 사람은 알아보기조차 힘들 글씨였다. ‘ㄹ’은 ‘乙’ 같고 ‘고’는 숫자 ‘2’ 같고 ‘어’는 시든 콩나물처럼 고개가 축 처졌다. 글자를 이루는 선들은 아무런 규칙 없이 하늘로 치솟거나 땅으로 꺼지거나 아주 제멋대로였다.

‘인생수업 : 글씨 콤플렉스 벗어나는 법’ 강연에서 한 참석자가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써 보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인생수업 : 글씨 콤플렉스 벗어나는 법’ 강연에서 한 참석자가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써 보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글씨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이건 평생 혼자 살아야 할 인격이겠다. 도저히 이래서는 안될 것 같아 이병대 한글필기체연구소장의 손글씨 강연에 임했다. ‘글씨파탄자’ 수백, 수천명을 봐온 이 소장이 입을 열었다. “글씨 못 써도 상관없죠. 그런데 마음속에 다들 묵직한 덩어리가 있지 않으신가요. 제가 만나온 사람들은 글씨 때문에 상처가 많은 분들이에요. 본인 잘못이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던 거죠.” ‘네 탓이 아니야’ 한마디에 응어리진 마음이 저절로 무장해제됐다. 따져보면 세종대왕도 한글을 “쉽게 익혀 편하게 쓰라”고 하지 않았나. 이 소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한글은 쓰기 어렵게 만들어진 글자가 아니에요. 과학적으로 만든 세계 최고의 문자예요. ‘쉽게 잘’ 쓸 수 있는 방법이 있고 여러분들은 그걸 효과적으로 배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 좋은 글씨는 좋은 자세에서

운동이나 운전처럼 몸을 쓰는 모든 행위가 그렇듯 첫걸음은 ‘좋은 자세’다. 엄지·검지·중지가 이상적으로 만나는 ‘삼각 그립(grip)’이 있다. 이 소장은 “펜 두 개로 젓가락질을 해 보라”고 했다. “그 상태에서 아래 볼펜 하나를 빼면 가장 편안한 그립이 나옵니다.” 손바닥은 꽉 움켜쥐지 말고 탁구공 하나 들어갈 정도로 풀어준다.

두번째는 종이의 각도다. 오른손잡이 기준 대부분 사람들은 종이를 왼쪽으로 기울여 글씨를 쓴다. “그런데 기성세대들은 종이를 책상과 직각으로 놓고 쓰라고 교육받았어요. 세로쓰기 시절에는 이게 맞아요. 하지만 가로쓰기를 하는 지금은 인체공학적으로 부자연스럽죠. 종이를 몸 앞에 둔 상태에서 반시계방향으로 15~20도가량 기울여 주세요. 우리 뇌는 이게 틀어졌다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세번째는 펜을 누르는 힘, ‘필압’이다. 필압은 최대한 낮추는 편이 좋다. 이 소장은 “붓글씨 쓰던 시절과 비교했을 때 현대인들의 필압은 굉장히 센 편”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꾹꾹 눌러 쓰는 볼펜이나 연필은 훈련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손이 쉬이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이 소장은 종이에 닿자마자 잉크가 번지는 펠트펜(플러스펜) 종류를 추천했다.

탁구공 하나 들어갈 정도로
손바닥을 풀고 ‘삼각 그립’
종이는 반시계방향으로
‘15~20도’ 정도 기울이고
초성 첫 획, 상단 선에 맞추니
“엇, 지렁이 글씨가 어디 갔지?”


피지컬(그립·필기구)을 갖췄으면 본격적으로 글씨를 써 볼 차례다. 이 소장은 먼저 “어떤 사람의 글씨가 잘 쓴 글씨냐”고 물었다. 한석봉?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당대 최고 명필과 ‘한글의 아버지’라 불리던 위인들이지만 그들의 필적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롤모델로 삼을 만한 ‘한글 명필’이 딱히 없는 상황은 왜 생겨났을까. 이 소장은 “한글은 600년이 채 안된 글자”라며 “수천년 된 한자나 로마자에 비하면 아직 사춘기나 마찬가지인, 아직도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어린 글자”라고 부연했다. 그리고 자신의 필적을 가다듬기에 앞서 “ ‘잘 쓴 글씨’의 정의를 먼저 내리고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잘 쓴 글씨는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람을 볼 때 ‘미인이다, 미남이다’ 판단하는 데는 0.1초도 걸리지 않아요. 깊게 분석해야만 잘 쓴 글씨를 알아보는 게 아닙니다. 직관으로 알아채는 거죠.”

지난 1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 사옥에서 열린 ‘인생수업 : 글씨 콤플렉스 벗어나는 법’ 강연에서 이병대 한글필기체연구소장이 펜을 쥐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지난 1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 사옥에서 열린 ‘인생수업 : 글씨 콤플렉스 벗어나는 법’ 강연에서 이병대 한글필기체연구소장이 펜을 쥐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 ‘기준선’만 기억하면 된다

잘 쓴 글씨, 아름다운 글씨의 비밀은 바로 ‘기준선’에 있었다. 기준선이란 글자가 나열돼 있을 때 가지런하게 정렬돼 보이는 가상의 선이다. 별 특징 없는 글자도 기준선만 잘 맞추면 맵시있어 보일 수 있다. 이 소장은 “모든 문자는 본능적으로 기준을 맞추게 돼 있다”고 말했다. 문자 특성에 따라 윗부분이나 중간, 아랫부분을 기준선으로 잡는다. 예컨대 알파벳은 ‘text’라는 단어에서 보듯 보통 글자 아랫부분을 기준선으로 잡는다. 반면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은 기준선 설정이 까다롭다. 무게중심을 수직기둥에 둔 가로모임꼴(가·갸·거·겨·기)과 수평선에 맞춰진 세로모임꼴(고·교·구·규·그), 두 형태가 섞여 있는 섞임모임꼴(긔·과·궈·괘)로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초성+중성+종성’으로 이뤄진 글자(예를 들면 ‘밥’)는 아랫부분까지 꽉 차지만 ‘초성+중성’만으로 이뤄진 글자(예를 들면 ‘새’)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기준선을 어디에 두고 글씨를 써야 할까. 이 소장은 초성 첫 획을 시작하는 상단에 선을 두고 글자들의 키를 맞춰서 쓰라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초성 위치를 대충 시작해요. 초성 위치를 잘못 잡으면 (줄 공책에 쓸 때) 밑선을 넘기지 않으려 하다가 글자 하단이 찌그러지는 일도 생기죠.” 이 소장은 “초성 시작점을 좀 더 위쪽으로 끌어올리라”고 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글자 아래쪽에 공간이 남는다. 행간이 널찍해지는 효과를 가져와 가독성이 훨씬 좋아진다고 했다.

어릴 적 ‘깍두기 공책’에 쓰던 버릇처럼 가상의 정사각형 네모를 꽉꽉 채워 쓰지 않아도 된다. 받침 있는 글자(예를 들면 ‘왕’)는 위·아래 선까지 부족함 없이 채울 수 있지만, 받침 없는 글자(예를 들면 ‘어’)의 초성 ‘ㅇ’을 뚱뚱하게 만들면서까지 아래 선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백으로 두면 된다. 이를 ‘탈네모꼴 글씨체’라고 한다. PC에서 흔히 쓰는 명조체 폰트처럼 정사각형 안에 쏙 들어가는 ‘네모꼴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설명을 듣고 난 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써 봤다. 이 소장이 미리 써 둔 ‘서시’는 그의 설명처럼 글자들의 윗부분을 연결한 기준선이 가지런했다.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내 보니 평소의 울퉁불퉁 못난 글씨체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이 소장은 “(기준선을 종성에 두고 써온 기성세대들은) 낯설거나 거부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받침이 없는 글자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기준선을 초성, 즉 위쪽에 두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고 덧붙였다.

■ 손글씨는 한글의 ‘품격’을 찾는 과정

왜 이토록 쓸모있는 ‘위쪽 기준선’을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걸까. 글쓰기 방식이 여러 차례 변혁을 맞으면서 ‘한글 미학’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탓이 크다. 한글 사용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기준선은 몇 백년이 흐르는 동안 점차 바뀌어 왔다. 한글은 한자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이 만든 문자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보면 기준선은 보이지 않고 한자처럼 정중앙을 기준으로 상하좌우의 균형을 맞춰 썼다.

그러다가 궁궐에서 행정을 맡아보는 궁녀들을 중심으로 궁서체가 정립됐다. 지금은 엄숙함·진중함의 표상처럼 쓰이는 궁서체이지만, 세로쓰기로 쓰인 글을 보면 기준선이 수직으로 올곧게 뻗어 있어 가지런하고 깔끔한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이 소장은 “세로쓰기 기준선은 한국인의 DNA에 남아있다”고 했다. 결혼식장에서 방명록 쓸 때를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현대의 한글 사용자들이다.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대변혁을 맞으면서 ‘오른쪽 수직 기준선’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 소장은 “새로운 쓰기 방식에 맞는 한글 조형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강의 한 번 들었다고 곧바로 또박또박 예쁜 글씨로 거듭날 리는 없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써 왔던 한글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0과 1로 이뤄진 디지털 세상에서, 종이와 펜촉이 맞닿아 내는 사각거림과 쓸 때마다 다채롭게 뻗어가는 선들의 자유로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 손글씨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세상이 더 좋아져 내 글씨체로 만든 전용 폰트를 갖게 되더라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소장은 여전히 사람들이 손글씨를 찾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한글의 기호적 의미는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글씨에 대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쓰면 쓸수록 느끼는 한글의 ‘품격’에 대한 갈증 때문이 아닐까요.”

◆8월 수업은 - 벼랑 끝에 선 나와의 대화

인생수업 8월 주제는 ‘벼랑 끝에 선 당신과 나의 대화’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죽겠다”라는 말을 종종 하기도, 듣기도 합니다. 마음과 상관없는 언어습관일 때도 있지만,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런 표현을 할 때도 있는데, 서로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김혜정 자살예방전문강사는 그 표현이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다면 관심을 갖고 대화를 이어가라고 충고합니다. 때로는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는 우리의 정서를 보듬는 방법을 함께 생각해보세요.

일시 : 2019년 8월19일 월요일 오후 7시~8시30분

장소 : 서울 중구 정동길3 경향신문사 12층 강의실(지하철 1·2호선 시청역 도보 15분, 5호선 서대문역 도보 10분)

참가 비용 및 인원 : 1인당 2만원, 30명 안팎

신청 방법 : all.khan.co.kr/apply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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